“ 대한민국 대표온천 
온양온천 신천탕

60년 역사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껴보세요!

온양온천의 유래


온양온천의 유래
온천 문화의 르네상스! 조선 왕실의 Healing 공간 "溫陽行宮"

온양온천의 유래
온천 문화의 르네상스! 조선 왕실의 Healing 공간 "溫陽行宮"

온양온천은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온천 

아산시 온천동에 위치한 온양온천은 현존하는 문헌기록상 그 출전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백제, 통일 신라시대를 거쳐 그 역사가 근 1300여년이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 온수군(溫水郡)이라 불리었던 것으로 보아 실제 온천의 역할을 수행해 온 기간은 600여년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 15년(1433년) 정월에 안질치료차 행차한 후, 세조, 현종,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께서 온궁(온양행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차 머물고 돌아간 다수의 기록과 유적들이 남아있으며, 또한 현종, 숙종때에는 온천에 임행하여 과거를 보게하여 인재를 발굴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 때에는 온양온천주식회사가 독점 온천장을 경영하고 1927년 이후는 경남 철도주식회사가 경영하던 신정관과 일본인 소유의 탕정관 등 2개소 뿐이었던 것이 1963년 신천개발이 개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38개 공의 온천공이 온양온천 중심부에 걸쳐있다.


온양온천은 "전국 최고"로  오래된 역사기록 

아산시의 역사는 온천수와 함께 흘러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한번오기도 힘든 지방행차에 세종, 세조 등 많은 왕들이 빈번하게 오갔으며 그 효험을 보았고 온양이란 이름이 알려졌다. 아산시 온천의 역사를 알아보고 온천의 가치와 의미를 역사를 통해 다시 음미해 보고자 한다. 온천이란 땅속에 있는 암장으로부터 발생하는 수증기나 가스가 지각의 깨진 틈을 타서 위로 올라오다가 땅속으로 스며든 지하수와 섞이어 지상으로 솟아 나오는 것을 말한다. 온도에 따라 25이하는 냉천, 25∼34도 미온천, 34∼42도는 온천, 42도 이상은 고온천이라고 한다. 온천은 화학적 성분에 의해 단순천, 유황천, 염류천 등으로 분류하는데 이중 온양온천의 온천은 단순천으로 중탄산나트륨, 유산마그네슘 등이 함유되어 있어 거친 피부, 신경통, 부인병 등에 효험이 있다. 본 온천지역은 1981년에 제정된 온천법에 의해 온천지역으로 지정 고시됐다. 


“대한민국 대표온천 온양온천 신천탕

60년 역사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껴보세요! 

< 이미지출처: 아산시 문화관광사이트>

온양온천이 부산 동래온천보다 504년이 빨라

아산 온천의 역사는 현존하는 문헌기록상 그 출전이 전국에서 제일 오래됐다. 이제까지는 부산의 동래온천의 연원이 더 우위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역사 기록상으로 볼 때 온양온천의 역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들이 많다. 먼저 그 온천역사의 시작점이라 볼 수 있는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천9백82년 전 삼국시대 초기인 서기 18년으로 이때는 백제시조 36년으로서 직산에 위례성을 쌓고 백제국을 건국한 시조인 온조가 남방제국들의 침략에 대비해 현 아산시 일원에 탕정성을 쌓았다. 여기서 탕정이란 "끓는 우물" 또는 "뜨거운 우물"이라는 우리의 고유 음에 대한 한자식 표기다. 

이는 가장 많은 지명과 인문지리를 기록하고 있는「신동국 여지승람」에서도 '탕'이라는 글자와 '온' 또는 '온정'이라는 글자가 모두 '온천'이었음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어 백제국 시대부터 온천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반면 부산의 동래온천은 그 기록이 너무도 자세하지 않다. 그나마 대략적 내용과 함께 그 역사를 알리는 단편적 기록이 「여지승람」과 경상도 동래현의 산천조편에 '온정'이라 하여 동래현 북쪽5리 지점에 있음을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신라 시대에 왕이 행차해 왕의 직속 온천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는데 막연히 신라시대 임만을 밝히고 있다. 23대 법흥왕 9년, 10년의 기록에 가야국에 청혼하고 왕이 남쪽을 개척하고 순행해 가야국왕과 회담을 한 기록이 있기에 신라에서 왕 직속의 온천으로 동래온천을 삼았다는 여지승람의 기록은 아무리 빨라도 서기 522년대 무렵에서 532년이기 때문에 아산역사 첫 기록인 서기 18보다 무려 504년∼514이나 뒤쳐진 것이다. 


고려사 "온천" 언급 

아산시의 온천이 역사적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은 앞서 밝혔듯이 1982년 전인 서기 18년부터이다. 온천수의 역사기록이 처음 등장한 백제 이후 기록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만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고려사」의 지리지에 현재 아산 중심의 옛 명칭이었던 온수군 역사연혁에서 ‘본래 백제 탕정군이었으며 신라 문무왕이 탕정주로 삼아 총관을 두어 다스리게 한 후 주를 폐하고 군으로 삼았다. 고려초에 온수군이라 했으며 현종 9년에 천안부에 내속시켰다. 명종2년에는 감무를 두어 다스리게 했고 관내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사 내용에 온천을 언급했음은 중앙과 지방에도 널리 알려질 정도로 전국에 명성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미지출처: 아산시 문화관광사이트>

역대 왕들의 온천행  

현재 「아산군지」와 「온양시지」등에는 조선시대 제4대 세종대왕이 온양온천에 제일 먼저 행차한 임금으로 기록돼 있으나 사실은 역사기록 누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산지역에 현존기록상 최초 행차한 임금은 백제 온조왕 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살펴보면 온조왕 36년 서기 18년에 현재 아산지역에 '탕정성'을 쌓았고 동왕 43년 가을 아산 들판에서 5일간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문헌기록에 정확한 왕명과 년대와 온천욕까지 했다는 기록은 고려사에서 문종 36년(서기81년) 9월 기록을 보면 『9월 계묘일에 천안부에 머물렀고 2일 후인 을사일에는 온수군에 당도하였다고 했다. 10월에는 왕이 친히 지은 시의 운자인 ‘늦은 가을에 남행해 천안부에 머물렀다'는 시를 보이면서 측근 신하들에게 그 운자에 의해 화답 시를 짓게 하고 등수를 정했다. 그중 좌산기상시의 벼슬을 가진 이의의 시가 사람들이 놀랄 만큼 우수하고 왕이 경탄하여 가상이 여겨 말 한필과 그 외 관원에게 비단을 차등하게 주었다.

신해일에는 재상들이 글을 올려 아산온천(당시 온수군 온천)에 행차한 것을 축하드렸다. 경신일에는 아산온천을 출발해 3일 후인 계해에 천안부에 도착했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현재까지 세종이 먼저 이용했다는 서기 1442년과는 3백60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또 태조는 서기 1396년 3월10일에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을 치료하려고 온천으로 오기도 하였다. 세조는 악성피부병으로 고통을 겪었다고 하며 완치를 못한 채 승하하였지만 온양온천을 가장 많이 이용하고 알린 인물이다.

세조 10년인 1464년 온천에 휴양을 하던 중 3월에 세조대왕의 숙소였던 온천행궁의 앞뜰에서 맑은 물이 분수처럼 솟아나와, 뜰에 가득해 파게 했더니 더욱 맑고 차가운 물이 솟구쳐 나왔다. 이것을 보고 세조는 온천수가 솟아나오는 '온정'옆에서 차가운 물이 솟아나오는 것이 신기하고 상서로운 샘이라고 해서 「신정」이라 명명하였고 이 소문이 널리 퍼져 팔도 수령이 상서로운 길조로 여겨 칭하하는 표문을 올리기도 했다. 세조는 왕을 호위하기 위해 수행한 중추원부사 임원준에게 이 사실을 기록해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 보호했다.

세조는 직접 냉천에 맛을 보고 달고 이상한 것이 하늘의 열상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성종 7년(1476년) 2월에는 왕대비인 정희왕후와 소혜왕후가 함께 온양온천을 행차했다. 그런데 7년 전에 세조가 세운 신정비가 풍마로 초라하게 변해 있자 당시 명필가인 이숙번에게 필사하도록 비문을 중각했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신정비」이다. 현종대왕 때는 전후 5회나 온행했는데 이 시기에 온양에서 과거를 시행해 인재를 선발하고 대신들에게 명해 온양지방의 효자와 열녀를 천거하기도 했다.

현종 6년에 온행해 과거를 베풀고 여기서 문과급제자 7인과 무과 2000인을 선발하기도 했다. 왕들의 온행으로 하여 온양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중앙정부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숙종 43년에 이르러서는 무과 2백여인을 선발했고 대신에게 하교해 경학에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후로 영조 때에는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서 단을 만들고 활쏘기 연습을 했는데 영조와 같이 온 후 사흘만에 뒤주에 갖혀 죽음을 당했다. 정조 19년에는 장헌세자가 활쏘기 하던 자리에 축대를 쌓아 사대의 규모를 완성 하였다.

장헌세자가 임행했던 유지를 기념하기 위해 이 사대를 「영괴대」라 명명하여 그 옆에 비각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정조는 남포현으로부터 오석을 운반해다 비석의 정문에 정조대왕의 어필로 영괴대라고 쓰고 후면에는 정조어제의 영괴대명을 당대의 젊은 명필가 윤행임이 글씨를 써서 조각했다. 영괴대의 비각과 비석은 현재 온양관광호텔 구내에 보전되어 있다.

예전에는 온천은 서민들보다는 왕가에 많이 쓰여졌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온천공도 많지 않아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많은 왕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에 자주 내려왔으며 이로 인해 온궁까지 짓고 몇 개월씩 체재하면서 국사를 다스리기도 해 한때나마 정치 중심지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일제 침략기의 온천 

조선왕조 말기에 흥선대원군이 집권해 온천행궁을 수리하고 별장으로 지정하였다고 하나 온양온천에 행차했다는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이 별세한 후에는 온천행궁의 소유권이 불확실하게 되었으며 일본 치하에 들어가면서 소유권도 일본인 수중에 들어갔다. 1904년에 일본인 불량배 수십명이 서울에서 내려와 온천행궁의 건물을 마구 철거하고 그 인근의 민가를 강제로 빼앗는가 하면 그 근처의 전답까지 경작 못하게 협박했다. 이후 일본인이 온양온천 주식회사를 만들어 온천을 독점해 온천장을 경영하면서 새로운 온천정을 시굴했다.

그 후 1927년경에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 온천장의 경영권을 계승받아 신정관으로 개칭해 운영했다. 그런던 중 1935년경에 일본인 데구찌가 당시 용출지점에서 동북쪽으로 100m의 가까운 거리인 탕정관에 심도 약150m를 뚫어 온천수가 용출하였다. 이 결과 경남철도주식회사 온천수의 용출량이 감소돼자, 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도 신정관 부근(현재 온양관광호텔 구내)에 온천수가 용출한 것이다. 온천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경남철도(현재 장항선)을 개통시킨 후부터였다.

이같이 일제시대에는 온수광천은 2개소뿐이 이었지만 무분별한 온천공 시축이 잇따랐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정부가 수립되면서 일본인이 강탈해간 신정관을 회수해 교통부에서 관리하다가 6.25사변을 만나 포화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교통부에서는 불에 탄 신정관 자리에 온양철도호텔을 지어 운영하다가 지금의 온양 관광호텔이 된 것이다.

1958년 신천개발공사 대표 이관형이 처음으로 온수광천을 개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38개소의 온수광천이 개발되었다.


온양온천의 유래


온양온천의 유래
온천 문화의 르네상스! 조선 왕실의 Healing 공간 "溫陽行宮"

온양온천의 유래
온천 문화의 르네상스! 조선 왕실의 Healing 공간 "溫陽行宮"

온양온천은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온천

아산시 온천동에 위치한 온양온천은 현존하는 문헌기록상 그 출전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백제, 통일 신라시대를 거쳐 그 역사가 근 1300여년이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 온수군(溫水郡)이라 불리었던 것으로 보아 실제 온천의 역할을 수행해 온 기간은 600여년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 15년(1433년) 정월에 안질치료차 행차한 후, 세조, 현종,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께서 온궁(온양행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차 머물고 돌아간 다수의 기록과 유적들이 남아있으며, 또한 현종, 숙종때에는 온천에 임행하여 과거를 보게하여 인재를 발굴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 때에는 온양온천주식회사가 독점 온천장을 경영하고 1927년 이후는 경남 철도주식회사가 경영하던 신정관과 일본인 소유의 탕정관 등 2개소 뿐이었던 것이 1963년 신천개발이 개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38개 공의 온천공이 온양온천 중심부에 걸쳐있다.


온양온천은 "전국 최고"로  오래된 역사기록

아산시의 역사는 온천수와 함께 흘러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한번오기도 힘든 지방행차에 세종, 세조 등 많은 왕들이 빈번하게 오갔으며 그 효험을 보았고 온양이란 이름이 알려졌다. 아산시 온천의 역사를 알아보고 온천의 가치와 의미를 역사를 통해 다시 음미해 보고자 한다. 온천이란 땅속에 있는 암장으로부터 발생하는 수증기나 가스가 지각의 깨진 틈을 타서 위로 올라오다가 땅속으로 스며든 지하수와 섞이어 지상으로 솟아 나오는 것을 말한다. 온도에 따라 25이하는 냉천, 25∼34도 미온천, 34∼42도는 온천, 42도 이상은 고온천이라고 한다. 온천은 화학적 성분에 의해 단순천, 유황천, 염류천 등으로 분류하는데 이중 온양온천의 온천은 단순천으로 중탄산나트륨, 유산마그네슘 등이 함유되어 있어 거친 피부, 신경통, 부인병 등에 효험이 있다. 본 온천지역은 1981년에 제정된 온천법에 의해 온천지역으로 지정 고시됐다.


< 이미지출처: 아산시 문화관광사이트>

온양온천이 부산 동래온천보다 504년이 빨라

아산 온천의 역사는 현존하는 문헌기록상 그 출전이 전국에서 제일 오래됐다. 이제까지는 부산의 동래온천의 연원이 더 우위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역사 기록상으로 볼 때 온양온천의 역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들이 많다. 먼저 그 온천역사의 시작점이라 볼 수 있는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천9백82년 전 삼국시대 초기인 서기 18년으로 이때는 백제시조 36년으로서 직산에 위례성을 쌓고 백제국을 건국한 시조인 온조가 남방제국들의 침략에 대비해 현 아산시 일원에 탕정성을 쌓았다. 여기서 탕정이란 "끓는 우물" 또는 "뜨거운 우물"이라는 우리의 고유 음에 대한 한자식 표기다. 이는 가장 많은 지명과 인문지리를 기록하고 있는「신동국 여지승람」에서도 '탕'이라는 글자와 '온' 또는 '온정'이라는 글자가 모두 '온천'이었음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어 백제국 시대부터 온천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반면 부산의 동래온천은 그 기록이 너무도 자세하지 않다. 그나마 대략적 내용과 함께 그 역사를 알리는 단편적 기록이 「여지승람」과 경상도 동래현의 산천조편에 '온정'이라 하여 동래현 북쪽5리 지점에 있음을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신라 시대에 왕이 행차해 왕의 직속 온천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는데 막연히 신라시대 임만을 밝히고 있다. 23대 법흥왕 9년, 10년의 기록에 가야국에 청혼하고 왕이 남쪽을 개척하고 순행해 가야국왕과 회담을 한 기록이 있기에 신라에서 왕 직속의 온천으로 동래온천을 삼았다는 여지승람의 기록은 아무리 빨라도 서기 522년대 무렵에서 532년이기 때문에 아산역사 첫 기록인 서기 18보다 무려 504년∼514이나 뒤쳐진 것이다.


고려사 "온천" 언급

아산시의 온천이 역사적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은 앞서 밝혔듯이 1982년 전인 서기 18년부터이다. 온천수의 역사기록이 처음 등장한 백제 이후 기록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만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고려사」의 지리지에 현재 아산 중심의 옛 명칭이었던 온수군 역사연혁에서 ‘본래 백제 탕정군이었으며 신라 문무왕이 탕정주로 삼아 총관을 두어 다스리게 한 후 주를 폐하고 군으로 삼았다. 고려초에 온수군이라 했으며 현종 9년에 천안부에 내속시켰다. 명종2년에는 감무를 두어 다스리게 했고 관내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사 내용에 온천을 언급했음은 중앙과 지방에도 널리 알려질 정도로 전국에 명성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미지출처: 아산시 문화관광사이트>

역대 왕들의 온천행

현재 「아산군지」와 「온양시지」등에는 조선시대 제4대 세종대왕이 온양온천에 제일 먼저 행차한 임금으로 기록돼 있으나 사실은 역사기록 누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산지역에 현존기록상 최초 행차한 임금은 백제 온조왕 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살펴보면 온조왕 36년 서기 18년에 현재 아산지역에 '탕정성'을 쌓았고 동왕 43년 가을 아산 들판에서 5일간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문헌기록에 정확한 왕명과 년대와 온천욕까지 했다는 기록은 고려사에서 문종 36년(서기81년) 9월 기록을 보면 『9월 계묘일에 천안부에 머물렀고 2일 후인 을사일에는 온수군에 당도하였다고 했다. 10월에는 왕이 친히 지은 시의 운자인 ‘늦은 가을에 남행해 천안부에 머물렀다'는 시를 보이면서 측근 신하들에게 그 운자에 의해 화답 시를 짓게 하고 등수를 정했다. 그중 좌산기상시의 벼슬을 가진 이의의 시가 사람들이 놀랄 만큼 우수하고 왕이 경탄하여 가상이 여겨 말 한필과 그 외 관원에게 비단을 차등하게 주었다.


신해일에는 재상들이 글을 올려 아산온천(당시 온수군 온천)에 행차한 것을 축하드렸다. 경신일에는 아산온천을 출발해 3일 후인 계해에 천안부에 도착했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현재까지 세종이 먼저 이용했다는 서기 1442년과는 3백60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또 태조는 서기 1396년 3월10일에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을 치료하려고 온천으로 오기도 하였다. 세조는 악성피부병으로 고통을 겪었다고 하며 완치를 못한 채 승하하였지만 온양온천을 가장 많이 이용하고 알린 인물이다.

세조 10년인 1464년 온천에 휴양을 하던 중 3월에 세조대왕의 숙소였던 온천행궁의 앞뜰에서 맑은 물이 분수처럼 솟아나와, 뜰에 가득해 파게 했더니 더욱 맑고 차가운 물이 솟구쳐 나왔다. 이것을 보고 세조는 온천수가 솟아나오는 '온정'옆에서 차가운 물이 솟아나오는 것이 신기하고 상서로운 샘이라고 해서 「신정」이라 명명하였고 이 소문이 널리 퍼져 팔도 수령이 상서로운 길조로 여겨 칭하하는 표문을 올리기도 했다. 세조는 왕을 호위하기 위해 수행한 중추원부사 임원준에게 이 사실을 기록해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 보호했다.

세조는 직접 냉천에 맛을 보고 달고 이상한 것이 하늘의 열상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성종 7년(1476년) 2월에는 왕대비인 정희왕후와 소혜왕후가 함께 온양온천을 행차했다. 그런데 7년 전에 세조가 세운 신정비가 풍마로 초라하게 변해 있자 당시 명필가인 이숙번에게 필사하도록 비문을 중각했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신정비」이다. 현종대왕 때는 전후 5회나 온행했는데 이 시기에 온양에서 과거를 시행해 인재를 선발하고 대신들에게 명해 온양지방의 효자와 열녀를 천거하기도 했다.

현종 6년에 온행해 과거를 베풀고 여기서 문과급제자 7인과 무과 2000인을 선발하기도 했다. 왕들의 온행으로 하여 온양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중앙정부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숙종 43년에 이르러서는 무과 2백여인을 선발했고 대신에게 하교해 경학에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후로 영조 때에는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서 단을 만들고 활쏘기 연습을 했는데 영조와 같이 온 후 사흘만에 뒤주에 갖혀 죽음을 당했다. 정조 19년에는 장헌세자가 활쏘기 하던 자리에 축대를 쌓아 사대의 규모를 완성 하였다.

장헌세자가 임행했던 유지를 기념하기 위해 이 사대를 「영괴대」라 명명하여 그 옆에 비각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정조는 남포현으로부터 오석을 운반해다 비석의 정문에 정조대왕의 어필로 영괴대라고 쓰고 후면에는 정조어제의 영괴대명을 당대의 젊은 명필가 윤행임이 글씨를 써서 조각했다. 영괴대의 비각과 비석은 현재 온양관광호텔 구내에 보전되어 있다.

예전에는 온천은 서민들보다는 왕가에 많이 쓰여졌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온천공도 많지 않아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많은 왕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에 자주 내려왔으며 이로 인해 온궁까지 짓고 몇 개월씩 체재하면서 국사를 다스리기도 해 한때나마 정치 중심지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일제 침략기의 온천

조선왕조 말기에 흥선대원군이 집권해 온천행궁을 수리하고 별장으로 지정하였다고 하나 온양온천에 행차했다는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이 별세한 후에는 온천행궁의 소유권이 불확실하게 되었으며 일본 치하에 들어가면서 소유권도 일본인 수중에 들어갔다. 1904년에 일본인 불량배 수십명이 서울에서 내려와 온천행궁의 건물을 마구 철거하고 그 인근의 민가를 강제로 빼앗는가 하면 그 근처의 전답까지 경작 못하게 협박했다. 이후 일본인이 온양온천 주식회사를 만들어 온천을 독점해 온천장을 경영하면서 새로운 온천정을 시굴했다.

그 후 1927년경에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 온천장의 경영권을 계승받아 신정관으로 개칭해 운영했다. 그런던 중 1935년경에 일본인 데구찌가 당시 용출지점에서 동북쪽으로 100m의 가까운 거리인 탕정관에 심도 약150m를 뚫어 온천수가 용출하였다. 이 결과 경남철도주식회사 온천수의 용출량이 감소돼자, 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도 신정관 부근(현재 온양관광호텔 구내)에 온천수가 용출한 것이다. 온천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경남철도(현재 장항선)을 개통시킨 후부터였다.

이같이 일제시대에는 온수광천은 2개소뿐이 이었지만 무분별한 온천공 시축이 잇따랐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정부가 수립되면서 일본인이 강탈해간 신정관을 회수해 교통부에서 관리하다가 6.25사변을 만나 포화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교통부에서는 불에 탄 신정관 자리에 온양철도호텔을 지어 운영하다가 지금의 온양 관광호텔이 된 것이다.

1958년 신천개발공사 대표 이관형이 처음으로 온수광천을 개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38개소의 온수광천이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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